한병철의 "아름다음의 구원"을 읽고.












한병철의 Die Errettung des Schönen(아름다움의 구원)을 읽은 적이 있었다. 책을 사고나서 다음 날 오후에 다 읽었으니, 하루 쯤 걸린 셈이다. 이 책은 그만큼 짧다. 각주를 제외한 분량이 100쪽이 안되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여백이나 줄의 간격도 넓다. 

물론 그것이 내용의 빈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병철은 이 책에서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 위기에 빠진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오늘날 어찌해서 위기에 빠진 것일까? 아니, 전작들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던 저자는 왜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병철이 보기에 긍정성(Positivität), 인터넷, 그리고 주체와 같이 오늘날의 사회를 특징짓는 요인들이 점점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설자리를 잃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의 본질적인 특징들이 아름다움을 몰아내고 있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관한 한병철의 논의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이다. 

책은 '매끄러움(das Glatte)'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제프 쿤스(Jeff Koons)의 조각, 스마트폰, 그리고 브라질리언 왁싱과 같이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는 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한병철은 매끄러움에서 찾는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히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매끄러움의 속성을 밝히는데 집중하지는 않는다. 한병철이 보기에 오늘날 매끄러움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시대 자체를 대표하는 원리인데, 지배관계, 커뮤니케이션, 인간관계, 예술,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비가 '매끄러워'졌기 때문이다. 

매끄러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끄러운 대상을 보면 그것이 깨끗하다고 느끼고 만지고 싶어한다. 반면에 표면이 거친 것을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매끄러움은 곧 긍정성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의 감각 중 촉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거리(Distanz)를 필요로 하는 시각과 달리 촉각은 대상과의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끄러움은 보는 것과는 달리 직접적(unmittelbar) 특징을 지닌다. 

 말했다시피 한병철이 보기에 오늘날의 사회는 지배관계 조차도 긍정성과 매끄러움으로 표현될 수 있다. 더 이상 시스템에 대해서 반기를 들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하고, 사회에서 실패하는 자는 이전과는 닫리 구조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실패의 원인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의 운영에 있어서 어떠한 파열음도 나지 않는다. 예컨대 산업화 단계에서 노동자들이 이따금씩 자본가에 대항하여 봉기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직장인들이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매그러움의 원리가 사회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저자가 보는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파열과 충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치명적이다. 다치지(verletzt) 않고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는 (저자가 보기에는) 없다. 아름다움은 항상 일상의 매끄러운 삶에 대해서 어떤 충격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저자가 보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움을 원하지 않고, 원할 수도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상실한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에 매몰되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셀피'(우리나라에서는 셀카)이다. 셀카에서는 맥락이 완전히 소거된다. 사진에 찍히는 본인의 얼굴이 가장 중요하고, 뒤의 배경은 말 그대로 배경(Hintergrund)가 되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문장은 간결하고 정갈하며, 무엇보다도 예쁘다. 그 때문에 문장을 짧게 이어감에도 불구하고 파괴적인 문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독일에서 많이 읽힌다. 한국에서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는 철학과 학생이나 문학과 학생이 있다면 읽어보게 만들고 싶은 글을 쓴다.
그러나 그의 글은 동시에 그만큼 '추상적'이다. 이는 내용에 있어서 소거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생생한 재현을 제 일의 과제로 보는 역사학도가 보기에는 내용적으로 부실하다. 산업화 시대의 지배원리와 지금의 지배원리가 과연 본질적으로 다를까라는 점에 있어서도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자기 자신에게서 책임을 찾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순응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이른바) '서양' 문명의 뿌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령, '운명'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관점 역시 얼마든지 순응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한병철의 글이 과거의 특정 부분을 지나치게 축소시키고 현실의 특정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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