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오스터함멜과 유럽의 아시아 담론
작년에 위르겐 오스터함멜(Jürgen Osterhammel)의 책 Die Entzauberung Asiens (아시아의 탈주술화)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책은 18세기 초기 근대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럽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분석한다. 4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핵심은, 초기 계몽주의때 유럽인들에게 '고도로 발전된 문명'으로서 인식되었던 아시아가 점차 그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여기서 아시아는 무엇보다도 중국과 인도를 의미한다). 18세기의 아시아는 유럽의 지식인이라면 모두가 연구하고 분석해야할, 그리고 그로부터 상당부분 배워야할 문명이었으나,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전환기에 이러한 인식의 극복, 혹은 단절을 일컫는 '탈주술화(Entzauberung)'가 일어났고, 결국 19세기말에 이르러서 아시아학은 일부 지역 전문가들만이 연구하는 고립된 분과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테제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유럽인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부정적인 아시아상을 지니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아시아의 탈주술화는 오히려 유럽인들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변화가 가져온 산물에 더 가깝다.
"Es wäre zu oberflächlich, die Entwicklung, die zu diesem Endpunkt führte, allein als den Übergang von einem "positiven" zu einem "negativen" Asienbild zu beschreiben. Man fasst sie besser als einen langsam verlaufenden Ausgrenzungsprozess, als eine Bewegung von einem inklusiven Europazentrismus, der die Überlegenheit Europas als eine Arbeitshypothese betrachtete, die von Fall zu Fall korrigierbar war, zu einem exklusiven Europazentrismus, der sie als Axiom voraussetzte".
"(지금까지 언급한) 이러한 결론으로 치달았던 발전을 단순히 '긍정적인' 아시아상에서 '부정적인' 아시아상으로의 전환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그보다는 이를 하나의 느리게 진행되는 배제의 과정, 혹은 '포함적' 유럽중심주의에서 '배제적' 유럽중심주의로의 움직임으로 파악하는 것이 낫다. 전자는 유럽의 우월성을 경우에 따라 교정가능한 연구의 가설로 삼고, 후자는 유럽의 우월성 자체를 공리로서 전제한다". (380쪽)
18세기까지 때때로 배우거나 스스로와 비교해볼 문명으로 여겨졌던 아시아는 19세기에 이르면 열등하고,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문명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이는 물론 19세기 말에 이르러서 벌어진 양 문명의 물질적 차이에 기인한 비교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양상은 유럽의 문명관에 기인한 비교불가성이다. 유럽이 발전적, 진보적 문명의 표상으로 해석되는 동시에, 아시아는 발전이 없는, 그리하여 '역사'가 없는 문명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오스터함멜이 이 책에서 헤겔을 자주 인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지식인이라면 모두가 참고해야할 문명으로서의 아시아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연구하는, 그리하여 푸코와 사이드가 말하는, 담론으로서의 '지역학'이 되었다. 이러한 아시아상의 변화를 통해 오스터함멜은 궁극적으로 근대 전환기에 유럽인들이 겪었던 이 문명관과 역사관의 전회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라고 나는 이 책을 이해한다). 오래되었고 그리하여 고전이 되어버린 주장을 새로운 소재, 그리고 튼실한 텍스트와 사료 연구를 통해서 뒷받침하는 이 책은 오스터함멜의 역사학자로서의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딴 이야기를 하자면, 오스터함멜은 독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거나, 독일이 아니더라도 근대사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보았을만한 역사학자이다. 그는 근래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거대담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학자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는 거대담론을 시도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역사학자로서 어쨌든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최대 단위의 - 곧 지구의 - 역사를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쓴다는 의미이다. 오스터함멜의 노력은 19세기를 서술한 그의 책 Die Verwandlung der Welt (세계의 변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오스터함멜은 서론을 통해서 '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서사 (Meistererzählung)'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세계사를 쓸 수 밖에 없는 역사학자로서의 숙명에 대해 언급한다. 1000쪽이 넘는 이 책은 독일 역사학과에서 근대사를 다루는 세미나라면 반드시 한번은 언급이 되는 책이다.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오스터함멜의 책은 대부분 분량이 두텁다. 어쩌면 그렇기에 한국에 번역이 잘 안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검색해보니 딱 2권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것조차 매우 짧은 분량의 입문서들이다. 아쉽다. 그의 책은 독일어권 연구자나 일반인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읽어볼만하기에 더욱 아쉽다.
오스터함멜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독일에 와서보니 좋은 독일 학자들 중 한국에 번역은 커녕 소개조차 안 되어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번역의 지체는 곧 학문의 지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혹시나 싶어 한국 모교의 강좌를 검색해보니, 아직도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토대로 서양의 아시아 담론을 다루는 수업이 있다. 사이드의 책이 역사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고전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고전은 고전으로서 다루어져야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고전 읽기를 통해서 당대 학문의 흐름을 따라잡는 것을 '퉁치려' 한다면 안된다. 한국 번역판 오리엔탈리즘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번역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제는 출판된지 수십년이 지난 책을 마치 최신 학술연구처럼 읽어서는 안된다. 한국에서 대학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이 최신의 연구 흐름을 언급하고 이를 수업에 활용했던 경험은 손에 꼽는다. 그렇기에 오리엔탈리즘을 다루는 수업 또한 어떻게 이루어질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그래서 아쉽다. 선생이 연구를 따라갈 능력 혹은 열의가 안된다면 최소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 스스로 찾아볼 수 있을만한 번역 환경은 갖춰놓아야 한다. 나는 그렇기에 영어 서적보다 불어와 독어 서적을 번역하는데 학계 차원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모든 것이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학계의 사정상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딴 이야기를 하자면, 오스터함멜은 독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거나, 독일이 아니더라도 근대사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보았을만한 역사학자이다. 그는 근래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거대담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학자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는 거대담론을 시도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역사학자로서 어쨌든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최대 단위의 - 곧 지구의 - 역사를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쓴다는 의미이다. 오스터함멜의 노력은 19세기를 서술한 그의 책 Die Verwandlung der Welt (세계의 변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오스터함멜은 서론을 통해서 '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서사 (Meistererzählung)'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세계사를 쓸 수 밖에 없는 역사학자로서의 숙명에 대해 언급한다. 1000쪽이 넘는 이 책은 독일 역사학과에서 근대사를 다루는 세미나라면 반드시 한번은 언급이 되는 책이다.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오스터함멜의 책은 대부분 분량이 두텁다. 어쩌면 그렇기에 한국에 번역이 잘 안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검색해보니 딱 2권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것조차 매우 짧은 분량의 입문서들이다. 아쉽다. 그의 책은 독일어권 연구자나 일반인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읽어볼만하기에 더욱 아쉽다.
오스터함멜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독일에 와서보니 좋은 독일 학자들 중 한국에 번역은 커녕 소개조차 안 되어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번역의 지체는 곧 학문의 지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혹시나 싶어 한국 모교의 강좌를 검색해보니, 아직도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토대로 서양의 아시아 담론을 다루는 수업이 있다. 사이드의 책이 역사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고전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고전은 고전으로서 다루어져야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고전 읽기를 통해서 당대 학문의 흐름을 따라잡는 것을 '퉁치려' 한다면 안된다. 한국 번역판 오리엔탈리즘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번역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제는 출판된지 수십년이 지난 책을 마치 최신 학술연구처럼 읽어서는 안된다. 한국에서 대학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이 최신의 연구 흐름을 언급하고 이를 수업에 활용했던 경험은 손에 꼽는다. 그렇기에 오리엔탈리즘을 다루는 수업 또한 어떻게 이루어질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그래서 아쉽다. 선생이 연구를 따라갈 능력 혹은 열의가 안된다면 최소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 스스로 찾아볼 수 있을만한 번역 환경은 갖춰놓아야 한다. 나는 그렇기에 영어 서적보다 불어와 독어 서적을 번역하는데 학계 차원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모든 것이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학계의 사정상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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